카이님(@Kaipy_bara)의 기숙학원AU 고온적청 B타입 커미션으로 작업한 글입니다
제목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 두 번째 문장에서 따왔습니다
이번 해는 방학보다 이르게 눈이 내렸다. 방학을 앞둔 기숙사는 소란스러웠다. 문 앞에 쌓인 눈들을 쓸고, 쌓인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복도 사이로 박스들이, 안팎으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간다. 과하지 않은 떠들썩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저 또한 슬쩍 끼어서 떠들어대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소스케는 잔류지? 아, 그렇지. 사소한 이야기들과 함께 문 옆으로 단단히 포장된 상자들이 쌓인다. 확실히 방학이구나. 매일을 학교에서 살던 사람이니 휴일을 실감하는 것보단 짐을 정리하는 쪽이 시각적으로 빨랐다. 하긴 그렇지. 마치 평생을 살 것처럼 들고 왔던 물건이란 물건들이 구석구석에서 꺼내져 나와 콤팩트하게 옅은 갈색 상자에 담기고 테이프로 둘둘 묶이는 과정부터 차에 실려 사람과 함께 우루루 떠나가는 모습은 다른 의미로 장관이다. 올해는 눈이 일찍 왔으므로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 빽빽하게 길이 막힐 것은 논외로 한다 ― 짐들이 실려 나가겠지. 투덜거리는 소리가 온갖 곳에서 들려오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잔류생은 편하다.
그렇게 대략 이 주간의 소란이 지속되다 방학식을 맞이하면 기이할 정도로 기숙사가 비었다. 매 학기 한차례 태풍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분명 차근차근 비어가고 있었을 텐데 방학식이라는 이벤트 하나만으로 갑자기 모두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다니 신기한 일이다. 물론 저 말고도 남은 학생들이야 있겠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기숙사에 나 혼자 있는 건가. 별로 마주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오래된 복도의 바닥이 삐걱대는 횟수가 줄어든 만큼 눈을 밟는 소리도 줄어들었고 하루에 몇 번 울리지 않는 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이러니까 꼭 외로움을 타는 것 같네. 방학의 첫날부터 생각이 많다. 시간이 남는데 할 일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 게 어쩐지 우습기도 하다. 방학이 오기 전에는 답지 않게 날짜까지 세어가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달력에 붉은 색 펜으로 표시를 해 뒀었지. 생각이 흐르고 도달하는 곳은 여전히 익숙한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렌 녀석, 뭘 하고 있으려나.
생각해보니 이상할 만큼 들은 얘기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도 자신은 잔류를 하니 곧 혼자서 쓰는 방이 생긴다고 신나서 떠들었다든지, 그 말을 들은 렌이 웃으며 혼자 쓰는 방이 좋은 거냐고 물었던 거라든지, 그런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거기에 아마 당연하다고 답했던가. 렌도 잔류하는지 물어볼 걸 그랬나.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부산스럽게 짐을 옮기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던 곳이니 그 중에 섞여 있었대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간다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 주지. 물어보지도 않고 신나서 떠든 이 쪽도 썩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조금 서운한 것이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다른 생각을 이어나간다. 방학 계획을 세워야 하긴 하는데, 역시 혼자서는 별로 의욕이 안 들고. 잠이나 좀 더 잘까. 하루쯤 잔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히는 것도 아닌데.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와 덮으면 순식간에 잘 준비가 끝났다. 모름지기 방학이라면 첫 날은 잠으로 날려줘야 한다는 게 세상의 룰이었다.
잠이 드는 건 금방이다. 눈을 감으면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깨우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푹 잠드는 것은 지금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 * *
렌이 오는 소리는 눈 같았다.
“소스케.”
창 밖에서 난 소리에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졸음이 덜 깬 정신으로도 익숙한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졸음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렌, 안 갔어? 저도 모르게 창문도 열지 않은 채로 말하다, 아니 그 전에 왜 창문으로 온 거지? 열어달라는 듯이 두어 번 두드리는 소리에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훅, 하고 방 안으로 몰려들어온다.
“아니, 렌, 렌이 왜 여기에?”
“왜 왔냐는 것도 아니고 왜 여기 있냐니, 무슨 서운한 소림까. 잔류했으니까 여기에 있지. 설마 소스케, 모르고 있었음까?”
“몰랐, 다기보다는 렌이 말해주지 않았잖아?”
“안 물어 보기에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죠. 아, 일단 들어가도 되죠?”
아직도 눈이 엄청 와서, 엄청 춥슴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머리와 어깨 위로 눈이 잔뜩 쌓여 있다. 아니 대체 왜 이런 추운 날에 창문으로. 높이도 꽤 있어서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일단은 손을 잡아 창틀을 넘긴다. 상체가 넘어온 이후에야 창 밖에서 눈 털고 오라는 말을 잊었다는 걸 떠올린다. 바닥이 발이 닿기 전 젖은 신발을 벗어 손에 든 렌이 신발장에 대충 구겨 넣는다. 크게 티내지는 않아도 평소답지 않은 다급함에 추웠음이 드러난다. 얼마나 밖에 있던 거지. 나 완전 푹 잠들었는데. 슬쩍 손을 잡자 마디마디가 차가웠다.
“우와, 소스케 손 따뜻함다.”
“렌이 찬 거야. 이불로 들어갈래?”
“당연히 좋슴다. 소스케도 같이 눕는 검까?”
“내 침대니까 그래야지.”
아직 체온이 떠나지 않은 이불 속으로 두 사람이 안긴다. 작은 우주에 웃음소리가 울렸다. 역시 소스케가 체온이 높은 편이라니까요. 추움이 덜 가신 듯 몸을 웅크리는 렌에게 좀 더 이불을 넘겨주면서 잠깐 놓았던 손을 다시 한 번 잡는다. 왜 문을 두고 창문으로 온 거야. 그야 소스케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죠. 질문에 어긋나는 답이지만 마주한 렌이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으므로 재질문은 좀 더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렌도 잔류했을 줄은 몰랐어.”
“어째섬까? 소스케, 나를 집으로 보내고 싶었던 검까?”
“아니, 그게 아니라.”
렌은 어쩐지 도련님 같은 느낌이잖아. 장난스러운 발언에 저도 모르게 답하는 말에 눈을 마주한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도련님 같아서? 응, 그러니까 집에서 모시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 말이 끝나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고개를 저어보였다. 뭐어, 데리러 온다고는 했지만 거절했슴다. 집에 가기 싫어서? 그것도 있고. 무엇인가 더 있다는 걸까. 말하고 싶은 내용이었다면 말했을 테니까 거기에 대해서도 캐묻지 않기로 한다. 그러지 않아도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길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전부야?”
“음……, 그게 메인이지만. 소스케라면 방학 동안 할 일도 아직 제대로 못 정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뭐?”
“그렇지 않슴까?”
“그렇기는 하지만.”
작게 쿡쿡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추궁하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 시간을 같이 했으니 그 정도를 알고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면 같이 계획을 짜러 온 거야? 그런 거죠. 그 긴 시간을 자신과 함께 맞추겠다는 말 같아서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들떴다. 렌이라면 벌써 계획을 다 짰을 것 같은데. 전혀요, 손도 안 댔슴다. 나랑 맞추려고? 소스케랑 맞추려고. 길지 않은 문답이 이렇게나 좋을 수 있는 거였는지 오늘 처음 깨달았다. 껴안은 품과 맞잡은 손에 아까보다는 열이 올랐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까. 사람이 적은 기숙사는 그만큼 넓어졌으므로 가볍게 떠올린 상상만으로도 할 일이 많았다.
그럼 무슨 계획부터 짜는 게 좋을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어느 것을 메인으로 하는 지에 따라 방학의 내용이 결정되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역시 수험을 대비해서 공부가 가장 중요한 걸까. 아니면 체력을 쌓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룰 지도 모른다. 전력으로 논다는 것도 좋지만 렌이 받아들여줄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고. 하나만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이므로 결국은 셋 다 들어가겠지만 고민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렌이랑 함께 있다면 뭐든 좋은데. 소스케. 아, 맞아, 요리라든지 청소를 어떻게 할 건지도 정해야 하는데. 내 말 듣고 있슴까? 렌이 계획을 짰다면 내가 거기에 맞췄어도 됐겠지. 소스케? 하나도 짜두지 않았다는 건 의외지만 나랑 맞추려고 했다니 이것도 기분 좋네. 안 듣고 있죠, 소스케? 생각해 둔 게 있냐고 물어 봐야……
“소스케!”
“우왔! 어, 어어?”
“지금까지 몇 번을 불렀는데. 사람을 옆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슴까?”
“아니, 별 건 아니고…….”
당연하게도 부루퉁한 표정이 돌아온다. 무슨 계획부터 짜는 게 좋을까 싶어서. 요리나 청소 당번도 있고. 별 거 아닌 생각에 제 목소리도 안 들렸냐는 말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부루퉁한 표정이 물러지는 건 아니지만 납득은 된다는 듯이 끄덕이는 것에 작게 숨을 돌렸다. 숨이 차는 듯 빈손으로 이불을 걷어 내려 얼굴을 내놓으며 렌이 따라 조금 가쁜 숨을 내쉬었다. 군데군데 냉기가 남아 있기는 해도 상당히 따뜻해진 이불의 안이 포근하다.
“그래서,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나도 별 건 아님다. 혹시 방학 때 하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하고 싶은 일?”
“예를 들면 독일어를 공부하겠다든지, 테니스 실력을 키우겠다든지 하는 거.”
“음……, 독일어는 몰라도 테니스는 좀 내키는 걸. 칠 줄 모르지만.”
“그럼 이번 방학엔 테니스를 쳐 보죠.”
“그렇게 되는 거야?”
평소답지 않은, 맥락에서 엇나가는 대화뿐이지만 즐겁다. 그럼 테니스하고 또 뭘 하지? 공부를 해야죠, 학생이니까. 독일어? 소스케가 하고 싶은 걸로. 그런 답을 들으면 어쩐지 독일어도 나쁘지 않은 것만 같다. 독일어라곤 아침 인사밖에 모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 사이에 또 구체적으로 허황되고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유리 공예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슴다, 라든지, 우주 비행사가 되기 위한 훈련은 어때, 같은 문장들이. 종종 두 사람의 생각이 맞아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치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이라도 되는 듯이 군다. 어쨌든 로맨틱했으므로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었으면서 결국 계획다운 계획이라곤 하나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정해진 건 아침밥은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챙기자는 것이었다. 둘 다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니 나쁘지는 않은 조건이었다. 그럼 한 쪽이 안 일어나면? 그럼 그 땐 점심이 될 테니까 자기 아침밥만 먹으면 되겠죠. 렌답게 명료한 대답이다.
“그래서, 또 뭘 정해야 하더라.”
“아직 정해진 게 없잖슴까.”
“뭐어, 아침밥을 정했으면 다 정한 게 아닐까.”
“이러고 또 내일 정하자고 할거 다 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어느새 제대로 품 안에 파고들어오는 렌을 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나 근데 아까 낮에 쭉 자서 잠 안 오는데. 나도 비슷함다. 어느새 저를 꽉 끌어안아 옷 아래로 뭉개지는 답이 마냥 좋았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흐른다. 대화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란 건 좋았다. 이쯤 오면 그런 사이가 아니란 게 이상하려나. 어색하게 놓인 팔로 등을 끌어안는다. 날개뼈 위에 닿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티셔츠의 아래로 밀어 넣다, 생각보다 따뜻해진 온도에 되레 이쪽이 놀랐다. 뭐하는 거냐고 투덜대는 목소리엔 이제 안 춥냐는 말로 답한다. 그렇게 부스스 웃다, 아까 물어보려다 말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자 그럼, 왜 이제 문을 두고 창문으로 왔는지 말해줘야지.”
“소스케가……”
“아니지, 그건 아까 들었던 답이잖아?”
“그걸 꼭 들어야겠슴까?”
“듣고 싶어.”
여전히 뭉개지는 음성으로 나오는 답이 예상보다 귀여워 좀 더 추궁하고 싶어진다. 아까보다 따뜻해져서 그런가. 조금 부끄러운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보이는 반응을 보면 놀리고 싶은 게 당연하다. 어쩐지 소악마가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응? 몇 번이고 이어지는 말에 결국 렌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소스케를 놀라게 해 주고 싶었슴다.”
“응?”
“서프라이즈! 하는 느낌으로, 말임다.”
꼭 그런 걸 물어봐야겠냐는 말을 부루퉁하게 덧붙이는 답이 정말로 평범한데, 그 답을 내놓은 사람이 렌이라는 점에서 평범하지 않다. 나를 놀라게 하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눈이 오는 밤에 먼 거리를 굳이 창문으로?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괜히 또 귀엽다. 떠올려보면 모범생 이미지가 강할 뿐 자신의 장난이나 놀이에도 곧잘 어울려주곤 했던 사람이 렌이었는데 왜 예상을 못 했을까. 작년 겨울, 눈이 내려 얼었던 운동장에서 책상으로 썰매를 타다 혼났던 게 생각났다. 그러다 혼나서 기숙사 봉사 활동을 했었고. 올해의 장난은 그럼 이건가? 다음에는 반대로 자신이 렌의 방까지 창문으로 가도 재밌을 것 같다.
“그래서 소스케, 놀랐슴까?”
“놀라기야 엄청 놀랐지.”
이 밤중에 창문을 두드린다면 그게 누구라도 깜짝 놀랄 걸. 산타클로스라도? 산타라도 그렇지. 또 실없는 농담들이 이어진다. 아니다, 굳이 자신이 렌의 방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지 않나? 비어 있는 침대가 자신의 옆에 있었다. 원래부터 이 인실이니까 렌이 와도 불편함은 없을 텐데. 렌이 잔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작 물어봤을 텐데. 그래도 물어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 일단은 말을 꺼낸다.
“그럼 렌은 계속 그 방을 쓰는 거야?”
“음, 그렇죠.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슴까?”
“아니 별 건 아니야. 룸메이트도 잔류고?”
“아뇨, 제일 먼저 방을 뺐을 걸요. 덕분에 혼자 쓰는 게 익숙해졌슴다.”
“혼자 쓰는 게 편해?”
“당연하죠. 누구라도 그렇게 답할 검다. 저번에 내가 그렇게 물어볼 때 소스케도 그렇게 답했으면서.”
갑자기 푹 기억이 난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한 자신이 기억 끄트머리에 있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이제 와서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려나. 역시 물어보려면 진작 물어봤어야 하는데. 이미 꺼낸 말을 어물쩍 넘어가기도 뭐하고, 여기서 더 미루면 그냥 각자 방을 쓰는 게 나을 것도 같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읽었는지 렌이 말을 이었다.
“뭐야 소스케, 우물쭈물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 소스케답지 않게.”
윽,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는데.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촉하는 음성이 딸려 나온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렌만 괜찮다면 같이 방을 쓰는 건 어떠냐고 하려고 했지.”
“흐응.”
“싫어?”
“싫진 않슴다만.”
잠시간의 간격을 두고 뒷말이 이어졌다. 방을 따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바로 긍정의 답이 나오지 않을 건 알고 있었지만 저 답은 의외다. 같이 쓰기 싫다는 완곡한 표현인가? 하긴, 수험이 있으니까 공부를 할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다른 말이 나오기 전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 갑작스레 저를 꾹 끌어안는 팔에 놀란 소리를 뱉는다.
“렌?”
“내가 이렇게 찾아오거나, 반대로 소스케가 내 방까지 와 주는 걸 생각하면 좀 두근거리잖슴까.”
어쩐지 즐거운 톤이다. 렌이 말하는 낭만을 단박에 이해한다. 그건 그렇지. 낮에 각자의 일을 하다가 밤에만 만나는 것도 좋았다. 생각해보면 하루 내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침이나 점심 식사 때,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면 저녁때도 만날 거였고, 테니스를 쳐 보자고 했으니 그 때도 같이 있다. 오히려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에 가깝다. 굳이 방을 같이 안 써도 되는 거였다. 같은 방에서 자고 일어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아냐, 잠시만. 방이 같지 않아도 침대 정도는 같이 쓸 수 있는데.
“……그러면 잠은 같이 잘래?”
“역시 소스케도 그 생각 하고 있을 줄 알았슴다.”
말과 함께 등 뒤에서 손이 꼼지락댄다.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럼 같은 침대애서 자고 일어날 테니 같은 방을 쓰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하다가도, 반대로 자신이 렌의 방에 갈 수도 있는 거니까. 학기 중에는 렌의 룸메이트가 신경 쓰여 ? 상당히 예민한 타입이었기에 기숙사 내의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는 주 요인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있는데 애정 행각을 하는 자신들이 나쁜 것도 있지만. 아니 근데 대체 언제 방에서 나간 거람. 갈 때마다 있고 나가지도 않아서 오히려 방에 없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 자주 못 찾아갔으니까. 연인의 방이라고 하면 일단은 두근거리는 게 당연하고, 그 뒤에 이어질 이벤트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면 누가 누구의 방으로 가?”
“음, 그 날 테니스에서 이긴 쪽의 방으로 가는 건 어떻슴까.”
“렌, 아까부터 왜 자꾸 테니스가 나오는 거야?”
“응원하던 선수가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거든요.”
“테니스도 봤어?”
“심심할 때 종종 봤슴다.”
그래서 배우고 싶어 하는 건가. 말은 저렇게 해도 이미 준 프로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부실한 모범생 느낌과는 다르게 운동도 나쁘지 않게 하는 신체능력의 소유자니까. 그렇다면 한동안은 자신이 렌의 방으로 찾아가야 하겠지.
“내가 테니스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어쩌려고?”
“저도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니 걱정 안 해도 됨다.”
저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특정한 약점이 없는 거니까요. 슬쩍 존 매캔로의 명언이라며 술술 가져오는 걸 보면 심심할 때 종종 본 수준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앞에서 상상했던 대로 상당한 마니아라면 어쩌지. 응원했다던 선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해 보기 전엔 모르는 거라고 의기양양하게 답하며 웃었다.
어느 정도 눈이 쌓였나 보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려 내다본 창밖은 설원에 가깝다. 내리는 눈은 멎었지만 소복하게 쌓인 눈들은 한동안 녹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까지 눈이 많이 쌓였다면 아무래도 실외의 테니스 코트는 사용하지 못 할 것 같다. 방학인데 눈을 치워 줄 관리인이 남아 있으려나. 실내 체육관이 열려 있다면 좋을 텐데. 행정실에 남아 있는 선생님께 부탁해 열쇠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다보는 바깥은 어쩐지 눈이 부시다. 이렇게 밝게 빛이 들어오는데 왜 몰랐을까. 이 정도 밝기라면 옛 고사성어에서 나왔듯 책을 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저를 따라 내다본 건지 고개를 든 렌의 얼굴도 선명하게 보였다. 시선이 문득 마주치고, 웃었다. 순식간에 이 넓은 기숙사에 둘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해보면 꼭 틀린 말도 아니다. 비율로 따지자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눈이 멎었네요.”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어쩐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 얼굴에 자신이 약한 걸 렌은 알고 있는 걸까. 자각하고 있는 거라면 너무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각하지 못 한 게 너무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저 얼굴이라면 무슨 표정을 해도 자신에게 너무한 거라고 마음속으로 슬쩍 억지를 부린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렌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일은, 별을 보러 가고 싶슴다.”
“별?”
“네, 하늘에 뜬 그 별.”
선약이 있는 건 아니죠, 소스케?
있을 리가 없다. 같이 누워 계획을 짰으면서 모를 리도 없었다. 렌의 쪽에서 무언가를 먼저 요구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어보면 답해야 하는 말은 하나였다.
“당연하지.”
눈이 멎은 위로 낭만이 쌓인다. 계획이고 뭐고 하나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일의 약속이 있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 잠은 오지 않지만 침대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밤의 내내 렌에게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완벽한 계획이었다.
2018. 01. 26
에스미 소스케X코사카 렌
베서니 (@vese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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