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캬게야마는 종교 따위는 믿어본 역사가 없다고 말한다. 신이라는 것이 존재했다면 자신이 살아온 인생은 어떻게 생각하면 좋은가. 해를 스무 번 넘겼던 자신이 바닥이 아닌 심연 가장 깊은 곳까지 추락하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이것은 벌이란 말인가. 할렐루야, 아멘, 그런 말들과, 찬양합니다, 오직 주 그리스도, 하나님 아버지, 찬송합니다, 그런 기도들을 하지 않아서, 그런 인간에게는 지옥이 어울린다는 말인가. 자신에게 십자가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러므로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장사한 지 사흘만에 죽은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실 메시아의 품으로 돌아갈 수도 없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참으로 단정하지 않을 수 없다. 눈을 감고서도 손 위에 있는 것을 읽는 마냥 부드럽게 발음이 울렸다. 음색은 자장가에 비슷했으나 지나치게 낮았고, 들려준다기엔 지나치게 혼잣말 같았다.
종교가 있는 학교를 초등부부터 다녔다고 했다. 세례명이 무엇인지는 들려주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는 중요하지 않겠으나, 그렇기 때문에 더욱 어울리는 모양새였다. 장소만 조금 바꾼다면 독실하고 신실한 신자로 보일 것 같았다. 당장 지금도 듣고 있는 자신이 없다면 길거리에 앉아서도 기도를 올리고 성경 구절을 외며 믿음을 잃지 않는 순교자로 보일 텐데. 칼 마르크스는 종교가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으나 지금 이 순간의 신도들에겐 진통제보다는 중독제에 가까웠다.
그런 것들을 읊어도 이제는 지옥이다. 자신의 곁을 떠나지 않음을 증명하기 위해 종교의 경전을 읽어줌은 아이러니, 패러독스, 안티노미, 아포리아 그러한―, 그러한 경건함이었다. 신이 없는 신도들이 아닌가.
문득 손을 뻗는다. 뻗음에도 불구하고 닿지 않을 것 같아서, 선악과를 씹어삼킨 인간의 원죄를 느끼고, 밤은 내려앉았는데도 그는 마치 빛 같고, 형, 나만, 나만 지옥에 있는 거면 어떡하지, 그래서, 당신은 단지 한 장의 검은 천으로 빛을 가렸을 뿐이라, 아직도 밝아 구원의 여지가 있는데, 할렐루야, 아멘, 그런 말들을 하지 않았던 나는, 형이 읽어주는 것들이 진통제도 아닌 단순한 마약이 되어버린 나는,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눈을 감으면 목소리만이 선명하게 내려앉았다.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아멘…… ……
잊을 수 없는 손의 온기를 잊어버린 때는 언제였더라. 카게야마는 느리게 눈을 감았다가, 찰나의 어둠을 만끽하지도 못 한 채로 눈을 떴다. 공기가 차고 낮았으며 습했다. 곧 비가 내릴 모양이었다. 잠들 구석을 찾아야 하는데. 아무 데서나 잠이 들면 젖고 말 것이었다. 자신보다는 형이 젖지 않았으면 했다. 그의 형을 보면 그런 것에 별로 연연해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지만.
하긴 그랬다. 자신만 그를 신경쓰고 있다는 것은 아닐지 불안해 해 온 나날들이 많았다. 그의 변덕으로 지옥에 발을 들이고 동생이 된 것이었으니, 버려지는 것은 온당 자신의 몫일 것이다. 카게야마 슌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선택받을 수도, 선택할 수도 없었다. 그냥 그런 사람일 뿐이었다. 어울리는 것처럼 정장을 입고 밝고 높은 위를 향해 나아가고 싶었는데 선택에서 밀려나 끝까지 추락했다. 버리지 말아 주세요. 그렇게 말했던 자신이 있다. 여기에도 있었다. 느린 속도로 서서히 머릿속을 장악해 가는 기억들에 거스를 힘이 없었다. 망연하게 바라본다. 벽에 기대 냉기를 맞는다. 금이 간 아스팔트 벽보다 위태로운 물건이 누구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말도 안 돼. 두고 갈 리가 없잖아. 안심하고 싶어 내뱉는 말이었다. 자신이 없었다.
카게야마 슌을 이곳에 남겨둔 채로 야구루마 소우는 걸어 나갔다. 다녀올 테니 가만히 있으라는 무언의 표시였다. 두고 가면, 다시 와? 그렇게 묻지도 못했다. 그것은 아마도 형제의 규율이었고 지옥에서 살아가는 이들의 불문율일 것이다. 시험일지도 모른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하며 부탁할 존재가 없었다. 지옥에서 사는 다른 사람을 만나 볼 일도 없으니 누군가에게도 질문하지 못 했다. 이런 질문을 누구에게 하지. 텐도 녀석? 카가미? 미시마 씨? 아니면…… 카게야마에게는 더 이상 생각나는 이름이 없었다. 별로 이상할 일도 아닌데 이상하지, 하며 덧붙이고 싶었다.
비가 올 것이다. 좁은 골목에 남겨진 채로 숨을 내쉰다. 비가 오는데. 더 어두워지기 전에 낡은 폐건물이라도 찾아 들어가지 않으면 안 될 텐데. 그러나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하면 좋지. 버려진 강아지의 꼴도 이만큼 비참하지는 않을 것이다. 쏟아진다. 속에서, 무언가가, 쏟아져, 정신이 나갈 것 같다고 생각하고, 당신이, 없으면, 지옥에 다다라서 또, 카게야마는.
형, ……형, ……, 형……, 야구루마…… 씨, …… (침묵) …… (이어짐) ……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이 기도를, 누구에게 하지?)
……그리고,
머리 위로 붉은 열매가 떨어진다.
고개를 들었다. 야구루마 소우가 있었다. 어딜 갔다 왔냐는 그 흔한 물음조차 던지지 못 했다. 이것은, 물음이 아니라 시험이다. 소리 없이 바닥으로 구르는 열매를 내려다본다. 속까지 제대로 영글지 못 한 듯 비틀어진 모양새의 것은 아마도, 선악과의 비유로 자주 사용되는, 단 것으로 보였다. 아, 그렇구나, 우리는 이미 지옥이다. 잡을 빛도 신도 없다는 것을 눈 앞의 그는 종종 이런 형태로 알려주고는 했다. 카게야마 슌은 벌이라면 받고 있다. 당신은 나를 지옥으로 이끄는 유일한 사람이다. 손을 뻗어 과실을 집어들고 게걸스럽게 삼킨다. 이것은 금단이었고, 속박이었으며, 이정표였다. 속이 비었는데도 농밀하게 익어 그 즙이 손과 팔뚝을 타고 흘러내렸다. 비가 내리면 씻겨져 나가도 흔적처럼 남을 것이다. 나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우리는 이미 지옥이었다.
성대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나름대로 인지도가 있었다. 고막에서 심장으로 울리고 다리에 전해지는 것들이 대중의 일부에게 사랑받을 가치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해서 어디로 가지. 연주의 동안 몸을 흔들고 소란을 일으켜 관중이 되는 순간만큼은 그런 생각을 들지 않게 한다. 빠르게 회전하는 회전목마에 함께 올라 탄 한 패거리들이다. 야구루마 소우의 밴드는 그런 모양새였다. 그들은 금기를 다룬다.
인간은 모두 죄인이다. 원죄라는 것을 뒤집어 씌운 종교의 교리가 다른 방향으로 만족스러웠다. 이러면 안 된다는 것을 모르고 시작하는 사람이 세상에는 얼마나 있을 것인가. 인류의 대부분이 금기를 욕망한다. 손대지 말라는 열매를 따고 싶어하고, 열지 말라는 상자를 열고 싶어하며, 넘지 말라는 선을 넘고 싶어하고, 그 과정에서 쾌락을 느끼는 사람들. 그래서 야구루마 소우는 대체로 그런 곡을 썼다. 인류와 그 역사의 태생부터 낙인처럼 찍히고 세대를 거쳐오며 이어지는 터부시되는 것들에 대한 욕망을 다루는. 고대에 태어났다면 종교화로 남았겠지. 기타의 줄을 흔들고 목으로 소리를 터트리며 야구루마는 무대에서 웃었다. 인간은 모두 지옥에 갈 것이다. 환호는 신성에 대한 모독이었으며 열정과 열망으로 가득 찬 이단이었다.
그리고 무대가 아닐 때에는 네 앞에서만 웃었다.
"단 걸로 드릴까요, 그냥 우유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그러면 보통은 코코아였으나 곡을 쓰고 싶어 하는 눈치일 때는 우유를 내 왔다. 뜨겁지는 않게 데운 머그잔을 데우면 그 안에 든 고소한 액체가 작게 일렁였다. 카게야마는 야구루마의 오랜 팬이었다. 밴드를 결성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변변치 못 한 CD를 처음 냈을 쯤부터 자신을 봐왔다고 했다. 그런 팬쯤이야 적지 않았으나 유독 마음이 갔다. 거짓말이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종종 우스웠다. 고작 밤 무대나 그럴듯한 공연의 앞 줄에서 눈이 마주쳤다고. 이벤트라도 주최하면 가장 먼저 달려와 줬다고. 팬과 사적인 관계가 되는 것은 좋지 않은 일이다. 그 일로 추문이 돌고 밴드를 내려놓았던 선배, 혹은 후배들을 야구루마는 수도 없이 보았다. 목 아래로 따뜻한 우유를 넘긴다. 단 맛이라고는 가미되어 있지 않다. 이 담백함을 자신에게 맞춰주는 사람이라고. 그래서.
그러면 안 되나. 야구루마는 이 쯤에서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깨달았다.
그러면 안 되는 일이잖아요.
카게야마가 그 목소리로 말해주기를 바라고 있었다.
"다음은 언제에요?"
"다음 주 일요일이려나."
곡을 다 써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그러면 카게야마가 밝게 웃었다. 야구루마 씨라면 할 수 있을 거예요. 전 믿어요. 믿으니까 이런 관계가 되었다. 잔을 내려두고 거리를 좁혔다. 키스나 섹스는 하지 않았지만 그에 준하는 행위를 하고는 했다. 시선과 눈빛과 무언의 감정들이 질척하게 얽힌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었다. 너를 보고 있으면 곡이 나왔다. 너라면 함께 지옥으로 가도 좋다고 생각해. 말하지 않았다. 지옥에 데려갈 심산은 아니었으므로. 아무래도 비유였다.
그리고는 펜을 놓는다. 호흡을 가다듬고서 종이로부터 시선을 거둔다. 이름의 뒤에 이어질 문장을 시바 타케루는 아직 생각해내지 못 했다. 무엇 때문인지는 자신도 아직 모르는 채다.
종종 류노스케에게 연락이 오는 상상을 했다. 가장 요란스럽게도 자신을 따르던 녀석이었으니 상상은 어렵지 않았다. 일상의 모든 시시콜콜한 것들을 담은 문자가 연이어 몇 통이 온다거나, 여유가 있을 시간을 골라 전화가 걸려 온다거나 하는 것들이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차올랐다. 전화라면 겸연쩍음과 기쁨이 반쯤 섞인 목소리겠지. 어쩌면 쑥스러워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너무 자신의 이야기만 하지 않았냐며 뒤늦게 붙일 사과엔 괜찮다는 말로 답하자. 가장 아날로그에 가까운 방식도 적잖이 어울렸다. 예를 들면 며칠 간격으로 날아올 편지 같은 것. 나쁘지 않았다. 좀 더 정확한 말로는, 좋았다. 정갈한 글씨체로 적힌 여러 이야기들은 아마 나름대로 고심해서 적은 것들이겠지. 어느 날엔 자신이 기획한 공연이라며 날짜가 적혀 있기도 할 테고. 공상은 제지 없이 그려져 나간다. 마치 마땅히 처음부터 그래야 했다는 듯이.
자신이 문장을 쓰지 못 하는 건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런 것들을 기대하고 있었기 때문에.
먼저 연락을 한다는 선택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자신이 하지 않았을 뿐. 그제야 주군이라는 자리에 있었던 자신을 떠올린다. 신켄저로 싸울 사무라이들을 부르기 위해 활을 잡은 것도 내가 아니라 할아범이었지. 그 때야 혼자서도 싸울 수 있다는 생각이었으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처음부터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었던 자신이 눈에 비쳤다.
손 안에서 굴리던 펜이 미끄러져 떨어진다. 주울 생각은 들지 않는다. 쓸 문장을 모르는 채다. 펜을 들고 있어서 뭘 할 건지. 의미는 없다. 굴러간 펜은 첵상의 구석까지 들어갔다. 차라리 새 펜을 꺼내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문장을 적지 못 하는 손은 아무 것도 하지 않은 채 가볍게 책상을 두드릴 뿐이다.
* * *
원론적인 이야기로 돌아가기로 한다.써야 할 문장이 아니라 쓰고 싶은 문장을 생각해내 보는 건 어떨까. 나쁘지 않은 제안이다. 편지의 기원은 전하고 싶은 말이니까. 이거라면 누군가에게 물어볼 것 없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기엔 적격의 이유다. 문을 닫고 커튼을 친다. 외부의 빛이 들어오는 공간에 남겨져 펜을 쥔다. 낯선 감촉을 손끝으로 느끼며 길게 숨을 내쉰다. 하고 싶은 말을 센다.
류노스케, 너는 차 한 잔을 마신 이후에도 젖은 나무의 향과 옅은 연기가 섞인 향을 말해낼 수 있는 사람이었지. 그 언제, 쿠로코들이 준비해 준 차의 향에 느지막한 오후의 봄햇살 같다는 말을 붙인 게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었다. 입 안의 여린 구석을 감싸고 내려가는 따뜻한 차는 발끝까지 기운을 돌게 한다고, 맑은 금색의 차 위로 햇볕이 쏟아져 내리는 모습을 은은한 감동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을 퍽 신기해하기도 했었다. 자주는 아니더라도 종종 내뱉는 문장들을 칭찬하자 쑥쓰러워 하던 모습까지. 누구나 쓸 수 있는 말일 뿐입니다, 하던 말에는 아니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이제 와 깨닫는다. 그 자리에서 어울리는 말은 그게 네가 하는 말이기 때문에 자신에게 의미가 있다는 것이었다. 항상 깨닫는 게 조금씩 느렸다.
네가 휘두르는 검은 항상 아름다웠고. 제대로 몇 번 합을 겨뤄보지 못 했음을 이제와 아쉬워한다. 단순하게 우열을 가르기엔 정석도 상황 대응도 달라 겨뤄봄으로만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았는데. 언제나 쥔 손의 주인만큼이나 아름다운 검의 궤적이었다. 단정하고, 올곧아 조금의 빈틈도 허용하지 않을 듯 했다. 품이 넉넉한 도복의 소매가 가지런하게 움직임을 따라 흔들리는 모습마저 검의 움직임에 알맞았다. 과하거나, 모자라지 않는다. 몸이 어떻게 움직이는지를 바라보다 어느새 '이케나미 류노스케'라는 사람에게 집중하게 된 때를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사복 차림으로는 죽도를 잘 들지 않았었지. 신켄 마루는 자주 들고 다녔으니 그걸로 괜찮은 걸까. 아쉽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이 말은 쓰기 전 조금 더 생각을 다듬지 않으면 편지에 군더더기가 묻을 지도 모른다. 애초에 군더더기만으로도 쓰는 게 편지겠지만.
너를 붙잡아 할 말이 더 이상 남지 않을 때까지 새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하고 싶을 때도 있었다. 물론 먼저 말이 멈추는 건 자신의 쪽이리라. 할아범이나 마코, 치아키에게도 들었듯 말주변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그에 반해 류노스케는 말이 많은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때로는 그게 과해 한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것을 류노스케의 단점이라고 칭하는 이는 얼마 없었다. 원래 성품이 솔직하니까. 그런 식으로만 생각하는 건 조금 부족했다. 류노스케는 즐겁게 말을 하는 사람이었다. 아니라고 생각하거나 심기에 맞지 않는 말이면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아 종종 싸우기도 했으나 ― 특히 겐타와 치아키에게 그랬다. 사소한 다툼이 일 때마다 마코가 옆에서 한 마디씩을 붙여 조용히 만들던 모습이 익숙했다. ― 먼저 남을 헐뜯는 일은 없었다. 자신의 앞에서는 더욱 그랬다. 편지를 쓰려는 과정에서야 그게 자신을 위한 태도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이번엔 듣기만 해도 좋다는 말은 쓰지 않는다. 더듬거리더라도 받은 만큼 말해줘야 함을 알게 되었으니. 편지가 아니더라도 기다릴 수 있었다.
편지가 오기를 기다리는 때가 쓰는 때보다 길고 괴롭겠지. 정갈하게 이름과 주소만이 적힌 흰 색 봉투를 받았을 때에야 든 생각이었다. 사소한 일로는 자신을 귀찮게 하지 않겠다며 편지는 물론이고 전화며 문자도 하지 않았던 걸까. 이야기를 듣지 않았으므로 자신은 유추하는 것이 전부다. 그마저도 자유롭지 않다. 류노스케가 자신을 이름으로 불렀던 날에, 시바 타케루는 자신이 모르는 이케나미 류노스케를 마주했으므로. 류노스케가 자신에게 맡긴 목숨을 자신은 아직도 받아두고 있는 채였다. 그러니 그만큼의 태도와 행위로 보여주는 것이 당연하다. 말을 고르는 것은 언제나 어렵다. 그 어려운 일을 건너 자신에게 보내 온 편지이니, 류노스케, 답장이 될 이 편지는 주군으로써인 동시에 너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써의 편지가 되겠지. 처음 써 보는 연문이었다.
나는, 너의 주군은, 시바 타케루라는 인간은 잘 지내고 있다. 이 말이 듣고 싶어 류노스케가 빼곡히 적어 내린 자신의 이야기가 아니던가. 새벽달을 받으며 붓을 움직이는 그를 상상한다. 긴 편지지의 적힌 내용 모두가 오롯이 자신을 향한 내용이다. 주군의 독단으로 이것을 연서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네가 편지를 쓰던 그 날 밤의 달빛이 너무나도 아름다웠으므로. 시릴 만큼 푸르게 너의 방에 쏟아졌을 것이므로. 밤이슬에 휩싸여 새벽을 걷는 너도 아름답겠지. 문장은 전부 시바 타케루를 부르고 있었다. 그러니 나는, 온 하루를 공들여 류노스케 너를 부른다.
그러니…….
* * *
만나러 가겠다.
* * *
펜을 내려놓을 즘에는 저녁놀이 곳곳이 홍화 꽃이 물든 주홍빛 베일처럼 길게 온 땅 위로 늘어진다. 황혼의 시간은 백귀야행의 시간이라고도 하던가. 도착도 전에 잡아먹히는 것은 원하지 않으니 온전히 해가 지면 편지를 부치기로 한다. 흰 이슬을 맞는 편지도 운치가 있지 않나. 낭만에 빠진 청년이 하늘을 향해 눈을 굴린다. 어디선가 휘파람새가 울고 있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이 어둠이 오기 전에 가야 할 곳이 있었다.
이번 해는 방학보다 이르게 눈이 내렸다. 방학을 앞둔 기숙사는 소란스러웠다. 문 앞에 쌓인 눈들을 쓸고, 쌓인 자신의 짐을 정리하고, 복도 사이로 박스들이, 안팎으로 사람들이 이리저리 오간다. 과하지 않은 떠들썩함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니었기에 저 또한 슬쩍 끼어서 떠들어대며 시간을 보내고는 했다. 그러고 보니 소스케는 잔류지? 아, 그렇지. 사소한 이야기들과 함께 문 옆으로 단단히 포장된 상자들이 쌓인다. 확실히 방학이구나. 매일을 학교에서 살던 사람이니 휴일을 실감하는 것보단 짐을 정리하는 쪽이 시각적으로 빨랐다. 하긴 그렇지. 마치 평생을 살 것처럼 들고 왔던 물건이란 물건들이 구석구석에서 꺼내져 나와 콤팩트하게 옅은 갈색 상자에 담기고 테이프로 둘둘 묶이는 과정부터 차에 실려 사람과 함께 우루루 떠나가는 모습은 다른 의미로 장관이다. 올해는 눈이 일찍 왔으므로 흩날리는 눈발과 함께 ― 빽빽하게 길이 막힐 것은 논외로 한다 ― 짐들이 실려 나가겠지. 투덜거리는 소리가 온갖 곳에서 들려오지만 이러니저러니 해도 잔류생은 편하다.
그렇게 대략 이 주간의 소란이 지속되다 방학식을 맞이하면 기이할 정도로 기숙사가 비었다. 매 학기 한차례 태풍이 지나가는 느낌이다. 분명 차근차근 비어가고 있었을 텐데 방학식이라는 이벤트 하나만으로 갑자기 모두가 사라진 것처럼 느껴지다니 신기한 일이다. 물론 저 말고도 남은 학생들이야 있겠지만 비율로 따지자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이 기숙사에 나 혼자 있는 건가. 별로 마주치는 사람도 없을 테니까. 오래된 복도의 바닥이 삐걱대는 횟수가 줄어든 만큼 눈을 밟는 소리도 줄어들었고 하루에 몇 번 울리지 않는 소리는 생각보다 크게 느껴졌다. 이러니까 꼭 외로움을 타는 것 같네. 방학의 첫날부터 생각이 많다. 시간이 남는데 할 일은 딱히 생각나지 않는 게 어쩐지 우습기도 하다. 방학이 오기 전에는 답지 않게 날짜까지 세어가며 기다리고 있었는데. 달력에 붉은 색 펜으로 표시를 해 뒀었지. 생각이 흐르고 도달하는 곳은 여전히 익숙한 방이었다.
그러고 보니 렌 녀석, 뭘 하고 있으려나.
생각해보니 이상할 만큼 들은 얘기가 없었다. 기억을 더듬어도 자신은 잔류를 하니 곧 혼자서 쓰는 방이 생긴다고 신나서 떠들었다든지, 그 말을 들은 렌이 웃으며 혼자 쓰는 방이 좋은 거냐고 물었던 거라든지, 그런 것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거기에 아마 당연하다고 답했던가. 렌도 잔류하는지 물어볼 걸 그랬나. 당장 어제까지만 해도 부산스럽게 짐을 옮기는 사람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녔던 곳이니 그 중에 섞여 있었대도 이상할 게 전혀 없다. 간다면 간다고 말이라도 해 주지. 물어보지도 않고 신나서 떠든 이 쪽도 썩 잘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조금 서운한 것이다. 침대에 드러누운 채로 다른 생각을 이어나간다. 방학 계획을 세워야 하긴 하는데, 역시 혼자서는 별로 의욕이 안 들고. 잠이나 좀 더 잘까. 하루쯤 잔다고 해서 세상이 뒤집히는 것도 아닌데. 몸을 돌려 이불을 끌어와 덮으면 순식간에 잘 준비가 끝났다. 모름지기 방학이라면 첫 날은 잠으로 날려줘야 한다는 게 세상의 룰이었다.
잠이 드는 건 금방이다. 눈을 감으면 금세 졸음이 몰려왔다. 깨우는 사람도 없었으므로 푹 잠드는 것은 지금 누구보다도 자신 있었다.
* * *
렌이 오는 소리는 눈 같았다.
“소스케.”
창 밖에서 난 소리에 화들짝 몸을 일으켰다. 졸음이 덜 깬 정신으로도 익숙한 목소리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순식간에 졸음이 사라지는 느낌이다. 렌, 안 갔어? 저도 모르게 창문도 열지 않은 채로 말하다, 아니 그 전에 왜 창문으로 온 거지? 열어달라는 듯이 두어 번 두드리는 소리에 다급히 창문을 열었다. 찬바람이 훅, 하고 방 안으로 몰려들어온다.
“아니, 렌, 렌이 왜 여기에?”
“왜 왔냐는 것도 아니고 왜 여기 있냐니, 무슨 서운한 소림까. 잔류했으니까 여기에 있지. 설마 소스케, 모르고 있었음까?”
“몰랐, 다기보다는 렌이 말해주지 않았잖아?”
“안 물어 보기에 당연히 알고 있는 줄 알았죠. 아, 일단 들어가도 되죠?”
아직도 눈이 엄청 와서, 엄청 춥슴다. 자세히 보지 않아도 머리와 어깨 위로 눈이 잔뜩 쌓여 있다. 아니 대체 왜 이런 추운 날에 창문으로. 높이도 꽤 있어서 떨어지면 어쩌려고. 그런 말을 하기 전에 일단은 손을 잡아 창틀을 넘긴다. 상체가 넘어온 이후에야 창 밖에서 눈 털고 오라는 말을 잊었다는 걸 떠올린다. 바닥이 발이 닿기 전 젖은 신발을 벗어 손에 든 렌이 신발장에 대충 구겨 넣는다. 크게 티내지는 않아도 평소답지 않은 다급함에 추웠음이 드러난다. 얼마나 밖에 있던 거지. 나 완전 푹 잠들었는데. 슬쩍 손을 잡자 마디마디가 차가웠다.
“우와, 소스케 손 따뜻함다.”
“렌이 찬 거야. 이불로 들어갈래?”
“당연히 좋슴다. 소스케도 같이 눕는 검까?”
“내 침대니까 그래야지.”
아직 체온이 떠나지 않은 이불 속으로 두 사람이 안긴다. 작은 우주에 웃음소리가 울렸다. 역시 소스케가 체온이 높은 편이라니까요. 추움이 덜 가신 듯 몸을 웅크리는 렌에게 좀 더 이불을 넘겨주면서 잠깐 놓았던 손을 다시 한 번 잡는다. 왜 문을 두고 창문으로 온 거야. 그야 소스케가 보고 싶었으니까 그렇죠. 질문에 어긋나는 답이지만 마주한 렌이 그 누구보다도 환하게 웃고 있었으므로 재질문은 좀 더 뒤로 미루기로 결정했다.
“렌도 잔류했을 줄은 몰랐어.”
“어째섬까? 소스케, 나를 집으로 보내고 싶었던 검까?”
“아니, 그게 아니라.”
렌은 어쩐지 도련님 같은 느낌이잖아. 장난스러운 발언에 저도 모르게 답하는 말에 눈을 마주한 사람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도련님 같아서? 응, 그러니까 집에서 모시러 올 거라고 생각했어. 말이 끝나자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 고개를 저어보였다. 뭐어, 데리러 온다고는 했지만 거절했슴다. 집에 가기 싫어서? 그것도 있고. 무엇인가 더 있다는 걸까. 말하고 싶은 내용이었다면 말했을 테니까 거기에 대해서도 캐묻지 않기로 한다. 그러지 않아도 두 사람에게 남은 시간은 길었다.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게 전부야?”
“음……, 그게 메인이지만. 소스케라면 방학 동안 할 일도 아직 제대로 못 정했을 거라고 생각해서요.”
“뭐?”
“그렇지 않슴까?”
“그렇기는 하지만.”
작게 쿡쿡대는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는 것에 대해 추궁하고 싶어지는 기분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오랜 시간을 같이 했으니 그 정도를 알고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그렇다면 같이 계획을 짜러 온 거야? 그런 거죠. 그 긴 시간을 자신과 함께 맞추겠다는 말 같아서 괜히 가슴 한 구석이 들떴다. 렌이라면 벌써 계획을 다 짰을 것 같은데. 전혀요, 손도 안 댔슴다. 나랑 맞추려고? 소스케랑 맞추려고. 길지 않은 문답이 이렇게나 좋을 수 있는 거였는지 오늘 처음 깨달았다. 껴안은 품과 맞잡은 손에 아까보다는 열이 올랐다. 방학 동안 무슨 일을 하는 게 좋을까. 사람이 적은 기숙사는 그만큼 넓어졌으므로 가볍게 떠올린 상상만으로도 할 일이 많았다.
그럼 무슨 계획부터 짜는 게 좋을까.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어느 것을 메인으로 하는 지에 따라 방학의 내용이 결정되니까 당연한 이야기다. 역시 수험을 대비해서 공부가 가장 중요한 걸까. 아니면 체력을 쌓기 위한 내용이 주를 이룰 지도 모른다. 전력으로 논다는 것도 좋지만 렌이 받아들여줄만한 내용은 아닌 것 같고. 하나만 한다는 건 불가능한 이야기이므로 결국은 셋 다 들어가겠지만 고민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역시 렌이랑 함께 있다면 뭐든 좋은데. 소스케. 아, 맞아, 요리라든지 청소를 어떻게 할 건지도 정해야 하는데. 내 말 듣고 있슴까? 렌이 계획을 짰다면 내가 거기에 맞췄어도 됐겠지. 소스케? 하나도 짜두지 않았다는 건 의외지만 나랑 맞추려고 했다니 이것도 기분 좋네. 안 듣고 있죠, 소스케? 생각해 둔 게 있냐고 물어 봐야……
“소스케!”
“우왔! 어, 어어?”
“지금까지 몇 번을 불렀는데. 사람을 옆에 두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슴까?”
“아니, 별 건 아니고…….”
당연하게도 부루퉁한 표정이 돌아온다. 무슨 계획부터 짜는 게 좋을까 싶어서. 요리나 청소 당번도 있고. 별 거 아닌 생각에 제 목소리도 안 들렸냐는 말이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 말을 덧붙였다. 부루퉁한 표정이 물러지는 건 아니지만 납득은 된다는 듯이 끄덕이는 것에 작게 숨을 돌렸다. 숨이 차는 듯 빈손으로 이불을 걷어 내려 얼굴을 내놓으며 렌이 따라 조금 가쁜 숨을 내쉬었다. 군데군데 냉기가 남아 있기는 해도 상당히 따뜻해진 이불의 안이 포근하다.
“그래서, 아까 무슨 말을 하려고 했어?”
“나도 별 건 아님다. 혹시 방학 때 하고 싶은 게 있는지 물어보려고 했어요.”
“하고 싶은 일?”
“예를 들면 독일어를 공부하겠다든지, 테니스 실력을 키우겠다든지 하는 거.”
“음……, 독일어는 몰라도 테니스는 좀 내키는 걸. 칠 줄 모르지만.”
“그럼 이번 방학엔 테니스를 쳐 보죠.”
“그렇게 되는 거야?”
평소답지 않은, 맥락에서 엇나가는 대화뿐이지만 즐겁다. 그럼 테니스하고 또 뭘 하지? 공부를 해야죠, 학생이니까. 독일어? 소스케가 하고 싶은 걸로. 그런 답을 들으면 어쩐지 독일어도 나쁘지 않은 것만 같다. 독일어라곤 아침 인사밖에 모르지만 어떻게든 되겠지. 그 사이에 또 구체적으로 허황되고 불가능한 이야기들이 오간다. 유리 공예도 재밌을 것 같다고 생각했슴다, 라든지, 우주 비행사가 되기 위한 훈련은 어때, 같은 문장들이. 종종 두 사람의 생각이 맞아 같은 것을 이야기하기도 했다. 마치 우리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영원이라도 되는 듯이 군다. 어쨌든 로맨틱했으므로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한참을 떠들었으면서 결국 계획다운 계획이라곤 하나도 정해지지 않았다. 그나마 정해진 건 아침밥은 먼저 일어나는 사람이 챙기자는 것이었다. 둘 다 비슷한 시간에 잠자리에 들고 비슷한 시간에 일어나니 나쁘지는 않은 조건이었다. 그럼 한 쪽이 안 일어나면? 그럼 그 땐 점심이 될 테니까 자기 아침밥만 먹으면 되겠죠. 렌답게 명료한 대답이다.
“그래서, 또 뭘 정해야 하더라.”
“아직 정해진 게 없잖슴까.”
“뭐어, 아침밥을 정했으면 다 정한 게 아닐까.”
“이러고 또 내일 정하자고 할거 다 암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 어느새 제대로 품 안에 파고들어오는 렌을 보다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렸다. 나 근데 아까 낮에 쭉 자서 잠 안 오는데. 나도 비슷함다. 어느새 저를 꽉 끌어안아 옷 아래로 뭉개지는 답이 마냥 좋았다. 어색하지 않은 침묵이 흐른다. 대화가 없어도 어색하지 않은 사이란 건 좋았다. 이쯤 오면 그런 사이가 아니란 게 이상하려나. 어색하게 놓인 팔로 등을 끌어안는다. 날개뼈 위에 닿은 손을 천천히 아래로 내려 티셔츠의 아래로 밀어 넣다, 생각보다 따뜻해진 온도에 되레 이쪽이 놀랐다. 뭐하는 거냐고 투덜대는 목소리엔 이제 안 춥냐는 말로 답한다. 그렇게 부스스 웃다, 아까 물어보려다 말았던 질문이 떠올랐다.
“자 그럼, 왜 이제 문을 두고 창문으로 왔는지 말해줘야지.”
“소스케가……”
“아니지, 그건 아까 들었던 답이잖아?”
“그걸 꼭 들어야겠슴까?”
“듣고 싶어.”
여전히 뭉개지는 음성으로 나오는 답이 예상보다 귀여워 좀 더 추궁하고 싶어진다. 아까보다 따뜻해져서 그런가. 조금 부끄러운데.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보이는 반응을 보면 놀리고 싶은 게 당연하다. 어쩐지 소악마가 부추기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래서? 응? 몇 번이고 이어지는 말에 결국 렌이 입을 열었다.
“그게 말이죠, 소스케를 놀라게 해 주고 싶었슴다.”
“응?”
“서프라이즈! 하는 느낌으로, 말임다.”
꼭 그런 걸 물어봐야겠냐는 말을 부루퉁하게 덧붙이는 답이 정말로 평범한데, 그 답을 내놓은 사람이 렌이라는 점에서 평범하지 않다. 나를 놀라게 하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이 눈이 오는 밤에 먼 거리를 굳이 창문으로? 당연한데도 불구하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상황이 괜히 또 귀엽다. 떠올려보면 모범생 이미지가 강할 뿐 자신의 장난이나 놀이에도 곧잘 어울려주곤 했던 사람이 렌이었는데 왜 예상을 못 했을까. 작년 겨울, 눈이 내려 얼었던 운동장에서 책상으로 썰매를 타다 혼났던 게 생각났다. 그러다 혼나서 기숙사 봉사 활동을 했었고. 올해의 장난은 그럼 이건가? 다음에는 반대로 자신이 렌의 방까지 창문으로 가도 재밌을 것 같다.
“그래서 소스케, 놀랐슴까?”
“놀라기야 엄청 놀랐지.”
이 밤중에 창문을 두드린다면 그게 누구라도 깜짝 놀랄 걸. 산타클로스라도? 산타라도 그렇지. 또 실없는 농담들이 이어진다. 아니다, 굳이 자신이 렌의 방까지 가지 않아도 되는 방법이 있지 않나? 비어 있는 침대가 자신의 옆에 있었다. 원래부터 이 인실이니까 렌이 와도 불편함은 없을 텐데. 렌이 잔류한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진작 물어봤을 텐데. 그래도 물어보지 않는 것보다는 나은 것 같아 일단은 말을 꺼낸다.
“그럼 렌은 계속 그 방을 쓰는 거야?”
“음, 그렇죠. 신경 쓰이는 거라도 있슴까?”
“아니 별 건 아니야. 룸메이트도 잔류고?”
“아뇨, 제일 먼저 방을 뺐을 걸요. 덕분에 혼자 쓰는 게 익숙해졌슴다.”
“혼자 쓰는 게 편해?”
“당연하죠. 누구라도 그렇게 답할 검다. 저번에 내가 그렇게 물어볼 때 소스케도 그렇게 답했으면서.”
갑자기 푹 기억이 난다. 한 치의 거짓도 없이 진심으로 즐겁다는 듯이 그렇게 대답한 자신이 기억 끄트머리에 있었다. 그렇게 좋아했으면서 이제 와서 물어보는 것도 이상하려나. 역시 물어보려면 진작 물어봤어야 하는데. 이미 꺼낸 말을 어물쩍 넘어가기도 뭐하고, 여기서 더 미루면 그냥 각자 방을 쓰는 게 나을 것도 같고. 그런 자신의 생각을 읽었는지 렌이 말을 이었다.
“뭐야 소스케, 우물쭈물하지 말고 제대로 말해요. 소스케답지 않게.”
윽,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면 할 말이 없는데. 침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재촉하는 음성이 딸려 나온다.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은데. 그래도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자신이므로 어쩔 수 없었다.
“렌만 괜찮다면 같이 방을 쓰는 건 어떠냐고 하려고 했지.”
“흐응.”
“싫어?”
“싫진 않슴다만.”
잠시간의 간격을 두고 뒷말이 이어졌다. 방을 따로 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은데. 바로 긍정의 답이 나오지 않을 건 알고 있었지만 저 답은 의외다. 같이 쓰기 싫다는 완곡한 표현인가? 하긴, 수험이 있으니까 공부를 할 시간이 필요한 걸지도 모른다. 다른 말이 나오기 전 이런저런 상상을 하고 있다 갑작스레 저를 꾹 끌어안는 팔에 놀란 소리를 뱉는다.
“렌?”
“내가 이렇게 찾아오거나, 반대로 소스케가 내 방까지 와 주는 걸 생각하면 좀 두근거리잖슴까.”
어쩐지 즐거운 톤이다. 렌이 말하는 낭만을 단박에 이해한다. 그건 그렇지. 낮에 각자의 일을 하다가 밤에만 만나는 것도 좋았다. 생각해보면 하루 내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아침이나 점심 식사 때, 그리고 저녁을 먹는다면 저녁때도 만날 거였고, 테니스를 쳐 보자고 했으니 그 때도 같이 있다. 오히려 하루 종일 같이 있는 것에 가깝다. 굳이 방을 같이 안 써도 되는 거였다. 같은 방에서 자고 일어나는 것도 나쁘진 않지만. 아냐, 잠시만. 방이 같지 않아도 침대 정도는 같이 쓸 수 있는데.
“……그러면 잠은 같이 잘래?”
“역시 소스케도 그 생각 하고 있을 줄 알았슴다.”
말과 함께 등 뒤에서 손이 꼼지락댄다. 아무래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다. 그럼 같은 침대애서 자고 일어날 테니 같은 방을 쓰는 거나 다름없지 않나 하다가도, 반대로 자신이 렌의 방에 갈 수도 있는 거니까. 학기 중에는 렌의 룸메이트가 신경 쓰여 ? 상당히 예민한 타입이었기에 기숙사 내의 다른 곳에서 만나게 되는 주 요인이었다. 반대로 생각하면 다른 사람이 있는데 애정 행각을 하는 자신들이 나쁜 것도 있지만. 아니 근데 대체 언제 방에서 나간 거람. 갈 때마다 있고 나가지도 않아서 오히려 방에 없는 이미지가 떠오르지 않는다. ? 자주 못 찾아갔으니까. 연인의 방이라고 하면 일단은 두근거리는 게 당연하고, 그 뒤에 이어질 이벤트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러면 누가 누구의 방으로 가?”
“음, 그 날 테니스에서 이긴 쪽의 방으로 가는 건 어떻슴까.”
“렌, 아까부터 왜 자꾸 테니스가 나오는 거야?”
“응원하던 선수가 세계 대회에서 우승했거든요.”
“테니스도 봤어?”
“심심할 때 종종 봤슴다.”
그래서 배우고 싶어 하는 건가. 말은 저렇게 해도 이미 준 프로급의 실력을 갖추고 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다른 사람들이 자주 착각하는 부실한 모범생 느낌과는 다르게 운동도 나쁘지 않게 하는 신체능력의 소유자니까. 그렇다면 한동안은 자신이 렌의 방으로 찾아가야 하겠지.
“내가 테니스에 엄청난 재능을 가지고 있다면 어쩌려고?”
“저도 만만한 상대는 아닐 테니 걱정 안 해도 됨다.”
저의 가장 큰 강점은 바로 특정한 약점이 없는 거니까요. 슬쩍 존 매캔로의 명언이라며 술술 가져오는 걸 보면 심심할 때 종종 본 수준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앞에서 상상했던 대로 상당한 마니아라면 어쩌지. 응원했다던 선수도 있으니까. 어쨌든 해 보기 전엔 모르는 거라고 의기양양하게 답하며 웃었다.
어느 정도 눈이 쌓였나 보기 위해 슬쩍 고개를 돌려 내다본 창밖은 설원에 가깝다. 내리는 눈은 멎었지만 소복하게 쌓인 눈들은 한동안 녹지 않을 것 같다. 이렇게까지 눈이 많이 쌓였다면 아무래도 실외의 테니스 코트는 사용하지 못 할 것 같다. 방학인데 눈을 치워 줄 관리인이 남아 있으려나. 실내 체육관이 열려 있다면 좋을 텐데. 행정실에 남아 있는 선생님께 부탁해 열쇠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며 내다보는 바깥은 어쩐지 눈이 부시다. 이렇게 밝게 빛이 들어오는데 왜 몰랐을까. 이 정도 밝기라면 옛 고사성어에서 나왔듯 책을 보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저를 따라 내다본 건지 고개를 든 렌의 얼굴도 선명하게 보였다. 시선이 문득 마주치고, 웃었다. 순식간에 이 넓은 기숙사에 둘 밖에 남지 않은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생각해보면 꼭 틀린 말도 아니다. 비율로 따지자면 없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눈이 멎었네요.”
웃는 얼굴을 마주하면 어쩐지 아무 말도 하지 못 했다. 이 얼굴에 자신이 약한 걸 렌은 알고 있는 걸까. 자각하고 있는 거라면 너무한 일이다. 그렇다고 자각하지 못 한 게 너무하지 않다는 말도 아니다. 저 얼굴이라면 무슨 표정을 해도 자신에게 너무한 거라고 마음속으로 슬쩍 억지를 부린다. 그런 자신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렌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내일은, 별을 보러 가고 싶슴다.”
“별?”
“네, 하늘에 뜬 그 별.”
선약이 있는 건 아니죠, 소스케?
있을 리가 없다. 같이 누워 계획을 짰으면서 모를 리도 없었다. 렌의 쪽에서 무언가를 먼저 요구하는 것도 드문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물어보면 답해야 하는 말은 하나였다.
“당연하지.”
눈이 멎은 위로 낭만이 쌓인다. 계획이고 뭐고 하나도 정해지지 않았지만 내일의 약속이 있다면 괜찮은 거 아닐까. 잠은 오지 않지만 침대에서 나가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이 밤의 내내 렌에게 별에 대한 이야기를 듣자. 완벽한 계획이었다.